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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 위대함과 인간적 결함 사이 — 괴테, 그는 정말 누구였나

by 모모3 2026.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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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괴테"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심오한 명언, 인류의 사랑을 받는 고전, 위대한 대문호. 아마 대부분 이런 그림이 떠오를 겁니다. 그런데 괴테가 74세에 10대 소녀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분이 많죠.

오늘은 미화 없이 한 인물을 들여다봐 보겠습니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위대하다고 불렸을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독일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정치인, 희곡 작가, 연극 감독, 자연과학자 등으로 다방면에 걸친 업적을 세워 유럽의 문학과 문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업적이 왜 특별한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맥락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어는 '짐승의 언어'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불어와 영어뿐이었는데, 괴테의 작품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독일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언어 하나를 격상시킨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그가 20대 초반에 자신의 실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파급력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인공 베르테르의 패션이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고, 실연당한 사람들이 베르테르처럼 권총으로 자살하는 '모방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유명인의 자살 이후 연쇄 자살이 나타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26세부터 쓰기 시작해 83세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괴테의 인생 전체가 담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독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꼽힙니다.

문학뿐 아니라 생물학, 해부학, 지질학 등 과학 분야에서 14권의 저서를 펴냈고, 화가로서 3천 점에 이르는 그림도 남겼습니다. 한 인간이 한 생애에 이 정도의 흔적을 남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괴테를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으며, 출판된 괴테의 모든 서적을 소장하고 그의 흉상까지 자택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니체,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카프카 모두 괴테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이름들이 한 줄로 묶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괴테는

위대한 예술가가 반드시 훌륭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괴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평생 수많은 여성과 연애했습니다. 식당 주인의 딸, 목사의 딸, 친구의 약혼녀, 유부녀, 은행가의 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관계들이 끝나는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불쑥 사라지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1772년에는 어느 날 아침 그냥 베츨라를 떠났고, 1786년에는 칼스바트 온천 휴양지에서 동행들을 버리고 새벽에 혼자 이탈리아로 향했습니다. 10년을 교제한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괴테가 아무 말 없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는 그대로 멀어졌습니다.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연애뿐 아니라 관계 전반에서 괴테는 불편한 상황을 조용히 회피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는 무려 18년 동거 끝에 1806년에야 결혼했습니다. 크리스티아네는 평민이었기에 주변에서는 괴테의 사실혼을 말렸고 두 사람의 관계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 18년 동안 그녀는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말을 남겼지만, 정작 그 여성들에게 얼마나 공평했는지는 의문입니다.


74세의 노인이 10대에게 청혼한 일

이 이야기는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테는 71세 때 당시 16세이던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만나 사랑을 느꼈습니다. 스스로를 나무라고 타일렀지만 2년 후인 1823년, 74세의 괴테는 결국 19세가 된 울리케에게 청혼을 합니다.

괴테는 의사를 찾아가 이 나이에 혼인을 할 수 있냐는 진단까지 받았고, 의사가 매우 건강하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답하자 공작 아우구스트에게 부탁해 울리케의 어머니에게 청혼의 뜻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울리케의 어머니는 딸이 아직 결혼할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울리케 자신도 괴테를 따르고 존경했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괴테의 아들 부부와 함께 사는 것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친구이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일흔 넷에 19살 여자를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고!"라며 놀려댔습니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괴테는 이 실연의 슬픔을 『마리엔바트의 비가』라는 시로 남겼습니다. 상처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에는 누구보다 능했습니다.


위대함과 결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괴테의 문학적 업적은 250년이 지난 지금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언어를 바꾸고, 시대를 대표하고, 후대의 천재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신화적 존재로만 소비하는 것은 솔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관계에서 무책임했고, 편리할 때 사라졌으며, 노년에는 자신의 욕망 앞에서 나이와 사회적 맥락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과 열망을 작품으로 돌렸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파우스트가 그렇게 설득력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욕망하고, 방황하고, 상처를 남기면서도 멈추지 않는 인간. 괴테는 그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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